[하루 한 단어] 잔잔 –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하루
오늘은 기억에 남을 일이 없었지만, 마음에 남을 감정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의 의미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다.
날씨도 흐리지 않고 맑지도 않았고, 바람도 세지도 않았고, 햇살도 부드러웠다.
그 어떤 과장도 없이, 그저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모닝커피를 내리고,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일을 하고, 점심을 적당히 해결하고.
어떤 감정도 크게 출렁이지 않은 하루.
그래서인지 마음 어딘가가 ‘이건 기록할 만큼 특별하진 않은데’라는 생각에 스스로 시시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날들이 지나고 나면 곧 잘 떠오른다.
긴장할 일도, 실망할 일도, 감정의 진폭이 크지도 않았던 하루.
그 고요함 속에 있었던 작은 평화 같은 것들이,
나중엔 은근히 그리워진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진짜 ‘나쁘지 않은 날’이라는 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날인지도 모르겠다.
잠깐 창밖을 내다봤다.
초록이 한껏 짙어진 거리, 고요히 흘러가는 구름,
지나가는 사람들, 잠깐 멈춰 선 햇살들.
특별하지 않아도 좋다.
무언가를 쫓지 않아도 되고,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냥 오늘 하루가 나를 무사히 지나갔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하니까.
오늘 하루는 그렇게 잔잔하게 흘러갔다.
그 흐름이 마음에 들었다.
살아있다는 게 꼭 벅차야 할 필요는 없고,
감정이 넘쳐야만 의미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이렇게 조용한 날이 알려줬다.
파도 없는 물결처럼
우리가 자주 기억하는 날들은 보통 선명한 감정이 담긴 날이다.
기뻤거나, 울컥했거나, 혹은 무언가를 결심한 순간들.
그에 비해 ‘그냥 그런 날’은 쉽게 지나가고, 잊히고,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처럼 아무 일도 없고, 감정의 결이 고르게 이어진 하루는
언젠가 다시 돌아보고 싶은 날로 남는다.
바로 그런 고요함이, 내 마음에 아주 작은 쉼을 남겼기 때문이다.
출근길 버스 창가에 기대어 있던 시간,
일이 잘 풀린 건 아니지만 막히지도 않았던 순간들,
점심으로 먹은 단순한 국밥 한 그릇의 온도,
일과 후 조용히 틀어놓은 음악의 리듬까지.
모든 게 고르게 흘러갔다.
특별한 기쁨은 없었지만, 실망도 따로 없었다.
그저 오늘이라는 하루가 나를 조용히 감싸 안아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끔은 인생이 파도처럼 요동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정해진 시간에 눈뜨고, 할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스르르 피곤함이 찾아오는 리듬.
그 자체로 안정감을 주는 날들이 있다.
그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머무는 순간들.
그건 어쩌면 진짜 회복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감정의 파도가 밀려오지 않을 때, 우리는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
오늘 하루는 그런 날이었다.
잔잔해서 좋았고, 무탈해서 고마웠다.
파도가 없었던 게 오늘의 가장 큰 평온이었다.
그저 그런 날의 소중함
저녁이 되어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늘, 어땠어?”
생각보다 금세 대답이 나왔다.
“별일 없었어. 그런데 나쁘지 않았어.”
그 한 문장이 마음속 어딘가를 따뜻하게 했다.
이런 하루는 기록해 두지 않으면 쉽게 흘러가고 잊혀진다.
그래서 이렇게 적어두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괜찮았던 하루가 있었다고.
그날의 내가 무언가를 이루진 않았지만, 무너지지도 않았다고.
어쩌면 이런 ‘그저 그런 날’이 우리를 진짜 삶으로 이어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 많다는 건 그만큼 삶이 안정적이라는 뜻이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만큼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뜻이니까.
조용한 하루 속에서 나를 무너뜨리는 일 없이
그저 살아내는 연습을 한다는 건,
어떤 특별한 경험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잔잔한 하루는 감정을 조율하고, 마음을 정리하게 해준다.
감정이 터지지 않아서 좋은 게 아니라,
고요한 상태에서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별일 없는 하루는, 그 자체로 회복이다.
밤이 깊어지기 전, 이 고요함을 마음 한켠에 꼭 넣어두고 싶다.
내일은 어떤 하루가 될지 모르지만,
오늘 같은 잔잔한 날을 또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처럼 조용했던 하루가,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잔잔히 머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