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단어] 멍 – 아무것도 안 했지만 마음은 일했다
오늘은 그냥 멍했다. 뭘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다.
가끔은 하루가 흐르는데,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그냥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든다. 뭘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 날이었다. 집중도 안 되고, 이유 없이 기운도 없고.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는데, 그냥 그 상태로 있기로 했다. 그러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하루도, 내 안에서는 조용히 무언가가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을 떴고, 밥을 먹었고, 핸드폰을 봤고, 다시 잠들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그냥 흘러갔다. 뭔가 의미 있는 걸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해야 할 일은 많았고, 해야만 한다고 다짐했던 일들도 떠올랐다. 그런데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도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한 상태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장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따금 그런 날은 온다. 무력함이라기보다는, 일시정지 같은 느낌이다. 감정이 뚝 끊기고, 동기부여라는 단어는 스스로 기피어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하루를 낭비한 걸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다가, 더 큰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죄인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꼭 잘못된 걸까? 우리가 늘 의미 있어야만 하고, 성과를 내야만 하고, 발전을 해야만 한다면 삶은 너무 팍팍하지 않을까. 어떤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는 없을까. 의무로 가득 찬 삶에서 잠시 숨 돌리는 ‘멍한’ 하루는, 어쩌면 꼭 필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멍하다는 건 무감각이 아니라 회복의 방식
사람들은 멍하다는 상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집중력이 떨어졌거나, 피로가 누적되었거나, 혹은 현실 회피라고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멍’이라는 상태가 오히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스스로 회복하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자극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뇌는 일종의 슬로우 모드로 들어간다. 마치 컴퓨터가 과열되지 않도록 팬이 도는 것처럼 말이다.
멍하다는 건 모든 걸 놓는 순간이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누군가 말을 걸어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 이 상태를 자책하기보다, 오히려 ‘내가 지금 멈추어야 할 타이밍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오늘 멍하다는 건, 어제 너무 달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내일이 무거워서 그 앞에 숨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중요한 건 ‘지금 내 마음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멍하다는 감정마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를 살아도 괜찮다고, 조용히 나에게 말해줬다.
생각은 정지했지만 마음은 일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멍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오히려 마음은 조금 가벼워진다. 마치 어딘가에서 수리하고 돌아온 기계처럼. 그 하루 동안 나는 분명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어떤 목표도 이루지 않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분주한 정리가 있었던 것 같다. 감정의 뒤죽박죽,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들, 그 모든 것이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우리는 뭔가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회복하는 힘이 있다. 억지로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억지로 정리를 하지 않아도, 마음은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멍한 하루는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시간이다. 멍하게 보냈지만 사실은 가장 정직하고 순수하게 ‘나’에게 집중한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은 멍한 하루를 무조건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아, 나한테 이런 시간이 필요했구나’ 하고 인정해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 매일 같은 속도로, 같은 집중력으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멍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다음 날은 조금 더 명료해진다. 마음속에서 어제의 정적이 물결처럼 밀려나간다. 그리고 나는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는다. 오늘도 어딘가에 멍하니 앉아 있을 누군가에게, 그렇게 잠시 멈춘 하루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